'향불을 피워 기녀 300명이 정성으로 제를 올리니 충의어린 논낭자 영혼이 내려오는 듯하구나.’
논개를 추모하는 의암별제 정경을 묘사한 것으로 기녀 300명이 운집 했다니 대단했을 것이다.
조선사회 신분계급인 기생을 노류장화나 술자리 접대부쯤으로 여기는 경향이 많은데 기생들은 어려서부터 선발돼 호된 수련을 통해 배출된 엘리트였다.
안동 기생 탁문화와 재담을 나눴던 주자학 거두 주세붕이 '대학'을 외우고 익혔다고 칭송할 정도였다. 따라서 기생들은 고관대작들과 화 답하며 시를 지었는가 하면 지조 없는 선비들을 은근히 비꼴 정도로 절개가 있었다.
기생들이 이처럼 당당할 수 있었던 배경은 교육에서 비롯되었다. 구 한말 기생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이능화에 따르면 기녀들은 기생학교 에서 3년 동안 '삼강행실도'부터 시작해 '여사서'를 배웠다. 또 시서 화는 물론이고 각종 기예를 배웠다고 한다.
민족시인 김소월은 연변기생 채란과 교류하며 시적 영감을 받아 작품 을 남길 정도였다.
우리나라 기업 접대비 규모가 연간 5조원이며 접객업소에 종사하는 여성이 200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하지만 풍류와 멋, 질적 수준은 형편없는 지경이다.
기생처럼 덕목을 갖추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지나친 음란성 술문화 보다는 시와 풍류를 즐겼던 조상들 술문화를 되새겨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