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인터넷이 모든 것을 바꿔 버렸다. 인류 역사상 젊은이들은 등급도 없는 다양한 포르노그래피의 홍수 속에서 흔히는 사춘기 이전의 이른 나이에 이미 성에 눈을 뜨게 되었다. 오늘날의 청소년들이 성년의 나이에 들어설 때면, 그들 중 많은 자들이 노트북을 통해 수위 높은 오럴 섹스의 영상을 수백 개도 넘게 보았을 것이고, 그런 것을 좋아하는 그렇고 그런 수많은 계집애들이나 엄청 섹시한 수많은 슈퍼 보이들과 수없이 채팅을 해 봤을 것이다. 그리고 컴퓨터를 통해 수많은 음란 자료들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그들이 앞으로 실제로 경험하게 될 섹스는 사춘기 시절에 구축했던 환상 속에서 경험한 가상섹스의 수준에 결코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눈길을 끌었던 섹스 장면과 실제로 체험한 평범한 섹스의 차이는 한없이 크게 느껴질 것이다. 그들이 느끼게 될 무감각과 욕구불만은 그들이 봤던 너무나 많은 포르노그래피로 인한 무감각이고 실제 경험에서 오는 욕구 불만이다. 그들이 충분히 성숙하고 나면, 금욕을 택하거나 아니면 다른 중독에 빠지게 될 확률이 극히 높다.
포르노그래피가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다. 어쩌면 어느 정도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도색 장치가 되어버린 현재의 포르노그래피 문화는 성적 환상들을 초라한 방향으로 획일화하는 경향이 있다. 포르노의 시나리오는 욕망을 상승시키는 것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즉각적인 소비의 환각만 유지할 뿐이다. 남녀가 처음 만난 지 채 5분도 되지 않아 마치 고난도의 체조와도 같은 충격적인 체위로 성적 탐험에 뛰어든다. 그러다 제3의 인물이 합류하면서 또 다른 체위들을 보여 준다. 여기에는 서로에 대한 매력, 기다림, 정신적인 흥분 같은 것이 들어설 자리가 조금도 없다. 여자는 언제나 몸을 내맡기고, 언제나 만족한다. 내적인 떨림도 격동도 아찔함도 없다. 테크닉, 테크닉, 오직 테크닉뿐이다.
그런데 젊은이들의 환상은 언제나 이런 모델 위에서 구축된다. 그들은 스크린에서 보았던 것을 모방하려 하고 그런 기술만 추구할 뿐, 본질은 옆으로 제쳐 놓는다. 이때 소멸되는 것이 에로티즘이다. 모호함의 기술, 살짝 보여 주고 감추는 게임, 실재와 보이는 것 사이의 간격,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불확실함 등이 전혀 없는 것이다. 모든 형태의 수줍음이 사라졌을 때, 노골적인 외설이 법칙이 되었을 때, 더 이상 에로티즘은 없다. 그래서 권태롭다.
타자의 육체가 완전히 소모되었는데 욕망할 것이 뭐가 남아 있을까? 욕망은 욕구로부터 요구가 분리되어 나오는 그 경계선에서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한다고 정신 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말한다. 다시 말해 욕망은 강렬히 원하는 어떤 것, 즉각적인 소유의 한계를 넘어서는 어떤 것, 그 소유를 미루거나 중단할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이 남아 있을 때만 존재한다는 말이다. 욕망이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에 육체가 소모될 경우, 에로틱한 긴장감이 완전히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
쾌락의 신성함은 결국 욕망의 죽음으로 끝나고 마는 것일까?